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총신들 === 엘리자베스 1세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신(역사)|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은 총아들 중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여왕의 평생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 헨리 7세 시절 징세관이던 에드먼드 더들리의 손자이며, [[에드워드 6세]] 시절 후반 섭정으로 [[메리 1세]]를 제치고 [[제인 그레이]]를 옹립하려다 목이 날아간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아들이다.],''' 월터 롤리 경[* 미국의 [[버지니아 주]]에 여왕이 처녀임을 기리기 위해 버지니아(처녀)라는 이름을 짓자고 제안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각종 문학이나 과학 등에 자질이 있어 여왕의 후원을 받았지만 너무 오만한 탓에 사람들에게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한때 총애를 받았으며 여왕의 경호대인 젠틀맨 펜셔너(Gentlemen Pensioner)의 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시녀 레이디 베스를 유혹하여 임신시키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고, 풀려난 이후로도 한동안 총애를 받지 못했다. 이후 다시 젠틀맨 펜셔너의 대장을 맡았지만 이전만큼은 총애받지 못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의 시대에 죄를 짓고 사형에 처해졌다.],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경[* 시인 겸 평론가로도 유명하다.],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 받으며 [[무적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마찬가지로 해적이자 주요 해군 제공세력이었던 [[존 호킨스]], 여왕의 사촌으로 왕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당대 대프랑스 외교의 중심에 있던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 적지 않은 수의 역사학자들이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절 실제 권력은 벌리 남작에게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벌리 남작 작위는 왕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이 수여한 작위로 원래는 [[젠틀맨]] 계급 출신이었다. 세실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의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인물로써,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세실에게 '[[스피릿|스피리트]]'라는 별칭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별칭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여왕이 그를 매우 총애한다는 의미였다. 참고로 [[빅토리아 여왕]] 때 총리를 지낸 3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 이 사람의 직계후손이다.],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라운트 경, 레스터 백작의 양자[* 레스터 백작이 재혼한 여성인 에식스 백작 부인의 아들. 레스터 백작과 그들 모자는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이자 여왕의 말년에 특히 총애받았던 에식스 백작[* 에식스 백작은 여왕의 말년(즉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 등장했으나 여왕과의 사이가 몹시 두터워 많은 이들이 여왕이 에식스를 사랑한다고 볼 정도였다. 그러나 에식스 백작은 이후 여왕의 총애가 멀어지자 반란을 일으켰고 처형당했다.] 등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또한 여왕은 프랑스의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5남으로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남동생이다.]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실제로 혼담이 오가기도 했고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자기가 직접 프랑수아가 아침에 먹을 야채 수프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앙주 공작이 잉글랜드 왕위보다는 네덜란드 왕위에 구미가 당겨서 그곳으로 떠나버렸고, 여왕도 그가 진실한 사랑이 아닌 여왕의 지원을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서서히 지원을 그만두었다. 이후 앙주 공작은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전쟁 통에 사망했다.] 이렇게 기나긴 여왕의 남자(...)들의 목록을 늘어 놓으니 은근히 막장 삘이 나기도 하다. 그러나 야사나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부분은 접어두고 이렇게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도, 그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다는게 엘리자베스식 리더쉽의 성공적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주로 국무재상이자 왕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벌리 남작이 큰 외교적 틀을 세우고, 프랜시스 월싱엄 경 휘하의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에 포진해 있던 정보와 외교 네트워크가 실무를 집행하면, 사적으로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레스터 백작이 애교스런 연인의 속삭임(...)으로 여왕을 설득하고 이러한 중신들이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확실하게 무게를 실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신들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하고 군왕은 결정적인 대목에서만 개입하는 시스템은 권력의 핵심이 흩어지고, 대신들 몇몇 중심으로 왕실 내 계파가 형성되는 역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시스템의 취약함이 드러난 경우가 파리에 주재한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스테포드가 스페인 정부에게 뇌물을 먹고, 벌리 남작과 프랜시스 월싱엄 사이의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해 스페인을 위한 이중 첩자질을 한 경우가 있었다.[* 당대에도 여러 정황을 통해 이중 첩자라는게 확실했으나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고, 무엇보다 벌리 남작이 계속 쉴드를 쳐줘서 그냥 파리 대사직 이후 중직을 맡기지 않는 선에서 끝났다. 그러나 후대 역사학자들이 스페인 측의 첩보 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실제로 스페인을 위해 일한 이중 첩자였다는게 드러났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하루도 왕권이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16~17세기 유럽 왕실에서 이렇게 걸출한 신하들을 밑에 두고 이러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신뢰를 주면서도, 또 그 잘난 대신들이 왕권을 날로 먹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저런 가십거리와 막연한 낭만주의적 역사관 속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는 군왕이자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역사적 위대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신하들을 하나도 믿지 못하고 모든 사무를 공무원마냥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처리 했던 [[펠리페 2세]]는 권력 누수라는 쥐를 잡기 위해 공무의 원활한 소통이라는 초가삼간을 태운 격이 되어 버렸던 반면, 반대로 동시대 프랑스의 경우는 그 잘난 대신들의 힘이 너무 강해 왕이 있으나 없으나 한 [[위그노 전쟁|종교 내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앙리 4세]]가 수습 할 때까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